조선에서 돌아온 율의 짐 정리를 맡아서 한건 정교진이었다. 소중히 비단에 감싸 온 것이 어찌나 귀하게 느껴졌는지, 신중히 그것을 펼쳤는데. 율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의 모습도 있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에도 신경 쓰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이 사람이구나! 조선의 왕." 그리고 그 쌓여진 그림들 사이로...
율은 뒤돌아서서 잠시 궐 입구를 보았다. 모두가 나와 있었지만. 딱 한 사람. 그는 그곳에 없었다. 그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서평 사신들도 있었지만 율의 눈치를 살피는 듯하였다. 익히 그들도 궐에 지내는 동안 소문으로 왕과 율환관이 각별한 사이라는 걸 들은 듯하였다. 다만 그 이야기가 누군가의 귀에 쉽게 전해질지는 시간문제였다. 사신단 무리는 조선을 떠...
당당함이 지나칠 정도로 율은 가림막 너머 중전을 똑바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날카롭게 중전의 눈과 마주쳤다. "지금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알고 하는 소리입니까?!" "알다 마다요! 중전마마가 전하를 만나기 훨씬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 마음이 다른 적은 없었습니다. 오직 한사람. 그 사람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임금이 된 지금까지 말...
"벌써 며칠째입니까? 무슨 안건 회의가 이렇게 빨리 끝난답니까?! 전하는 정사를 돌볼 마음이 있기는 한 겁니까? 그렇게 왕이 되겠다고 기를 쓰더니~! 광해군 때가 더 좋았다는 이도 있다니깐요!?" "쉿, 그런 말은 조심하세요! 궁은 누가 들을지 모르는 곳 아닙니까?" "쳇. 들으라면 들으라지요. 그리고 서평에서 온 환관이란 자와 놀아난다는 소문이 돌던데, ...
늘어진 용포 안에는 하얀 인조의 속살이 드러났는데, 단 한 번도 태양 빛에 노출되지 않은 그런 피부였다. 그 옛날 교당의 하얀 겉면과 닮아 있었다. 그건 참을 수 없는 맛이었다. 율은 침을 한번 꼴딱 삼켰다. 바스락 누군가 그곳에 들어온 소리가 나자, 율은 소리 난 곳을 응시하였다. 인조는 듣지 못하였는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상기된 얼굴이었다. 잠시 응...
누군가의 기침소리에 인조는 자신을 안고 있던 율을 밀쳐내었다. 약간의 아쉬움이 묻어난 율이 입맛을 다시는 듯 떨어졌다. 운은 땅에 떨어진 익선관을 집었다. "저하, 괜찮으시다면 시간이 늦었으니, 강녕전에 드시지요. 동궁전 앞에 신하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 알겠네." 운의 도움을 받아 인조는 다시 익선관을 쓰고 별서를 나왔다. 자신에게 고개를 숙...
운은 태평관에서 울리는 연회 소리를 뒤로하고, 별서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궐내에서 은밀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운은 그런 곳에 누군가를 불렀다. 기다리고 있었던 이는 당상관 석관이었다. "석관!" "어쩐 일인가? 긴히 부탁할 일이라도 있는 겐가?" "... 자네 율이라고 기억하는가?" 석관은 운과는 어렸을때 부터 벗...
"나는 누구의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 질문을 던졌지만 누군가에게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은 아닌듯하였다. 하지만 그의 붉은 머릿결이 고심에 찬 표정과 다르게 바람에 살랑살랑거리며 평온하게 찰랑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누군가가 훔쳐보는 듯했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급한 발걸음이 가까워지더니, 이내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몸을 ...
<현재> 주환과 용진 사이의 이 알 수 없는 불편함은 오늘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학창 시절 때에도 둘은 함께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따로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 그냥 그 무리에 함께 하지 않았다면 길에서 모른 척 지나갈 정도의 사이였다. "정현이 뒤통수를 내가 쳤다는 네 억지 같은 말은..." "아니, 내가 말실수를 했네." 용진을 보며 씨익 ...
<현실> 주환의 질문에 너무 많은 게 담겨있었는지 잠시 용진이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보였다. 술잔을 빙그르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러고는 이내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이야? 내가 정현이에게 뭘 어쨌다고... 너야말로 정현이와 잘 지냈었잖아. 근데 왜 그랬어?" 주환 또한 용진의 물음에 웃으며 대답하였다. 미소에는 어둠도 섞여 있는 ...
<현실> "자자, 한 잔 들 하자고!" 주환이 갖고 온 술잔에 술을 따르며 이야기하였다. 모두들 술을 기울인 지 한두 시간이 되자 취기에 취해 있었다. "아..씨. 정현이 보고 싶다." 성채의 말이 자신의 의지랑 상관없이 모두에게 들렸다. 그리고 그들 또한 정현이를 떠올렸다. 자신들과 달리 정현의 모습은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그 시간에 멈춰버린 ...
<현실> 적막감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무슨 말을 누가 먼저 해야 할지 몰라서 다들 눈치만 보고 있는 거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아무도 떠들고 싶은 이가 없었다. 그곳은 누군가의 집인듯했다. 그리고 그들이 앉아있는 거실의 벽면은 이미 이름이 알려진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들이 자리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작품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했다. 단지. ...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기본 포스트
소장본, 굿즈 등 실물 상품을 판매하는 스토어
정기 후원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설정한 기간의 데이터를 파일로 다운로드합니다. 보고서 파일 생성에는 최대 3분이 소요됩니다.
포인트 자동 충전을 해지합니다. 해지하지 않고도 ‘자동 충전 설정 변경하기' 버튼을 눌러 포인트 자동 충전 설정을 변경할 수 있어요. 설정을 변경하고 편리한 자동 충전을 계속 이용해보세요.
중복으로 선택할 수 있어요.